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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놀자⑧>영원한 2인자 저우언라이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닉슨 미국 대통령과 함께 식사하는 저우언라이 총리.<출처: 조선닷컴, 조선일보 DB>

    

                         

19717, 미국 닉슨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인 키신저가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했다. 닉슨의 중국 방문과 양국의 수교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가 접대와 회답 실무를 직접 챙겼다. 국빈관으로 쓰는 댜오위타이 5호를 키신저의 숙소로 정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실내를 장식할 꽃이 없었다. 당시 중국은 소위 문화대혁명이라 불리는 홍위병들의 광란이 채 가라앉기 전이었다. 쓸데없는 허식일 뿐이라며 수도 베이징 시내의 화초도 모두 뽑히고 짓밟히고 난 후였다. 미국에서 온 VIP가 꽃 한 송이 없는 숙소를 어떻게 보겠는가. 그런데 저우언라이가 지시했다.

은퇴한 지 오래된 정원사들의 집을 찾아보라 !”

그의 판단이 옳았다. 한 사람이 자기 집 뒷마당에 몰래 꽃을 키우고 있었다. 문제는 해결되었다. 회답도 성공적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이런 사람이었다. 국가의 대사를 처결할 뿐 아니라, 사소한 문제 하나하나를 주도면밀하게 처리해내는 사람이었다. 1920년대 징강산에서 마오쩌둥을 만났을 때부터 동지이자 참모 역할을 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부터 총리를 알아서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제2인자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곤란한 일이 생기면 무조건 그에게 미뤘다.

저우언라이는 무엇이든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만년 총리, 영원한 2인자...하지만 그는 후계자의 반열에는 오른 적이 없다. 스스로 그런 야망을 품지도 않았다. 총리로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오쩌둥의 후계자 물망에 올랐고, 파멸해 갔다.

먼저 류사오치.

마오를 대신해 한 때 국가주석(명목산의 국가원수)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19621, 7천인 대회에서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비판했다가 눈밖에 났다. 대약진 운동은 마오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경제 개발계획으로 참담한 실패작이었다. 이로 인해 마오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졌고, 이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사주하고 묵인한 것이 문화내혁명이라고 한다. 맨처음 마오 비판의 포문을 열었던 평더화이와 함께 류샤오치는 홍위병들에게 시달린 끝에 목숨을 잃었다. 마오는 모른 척했다.

명장 린뱌오도 한 때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문화대혁명 와중에 스스로 확신을 잃었다. 군 내부의 측근들과 함께 마오 암살과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발각 되었다. 비행기편으로 탈출해서 노련을 향하다가 내몽고에서 추락사했다.

그 후, 마오는 36세의 상하이 출신 왕홍원을 후계자로 직접 지명했다.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닮았다며 베이징으로 불러올려 후계자수업을 시켰다.

왕홍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장칭(마오의 부인)

이들을 문혁 시기 4인방이라고 했는데, 장칭은 장칭대로 마오의 후계자가 될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들이 암투를 벌이는 사이 1976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오는 회궈펑을 후입 총리로 임명했다. 마오의 고향인 후난성 샹탄현 출신이었다. 후계구도는 다시 흔들렸다.

이후 몇 달간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있다가 19769월에 마오도 숨을 거뒀다. 왕년의 대원수 예젠잉과 리셴녠, 왕둥싱 등이 전격적으로 4인방을 제거했다. 왕홍원도 장칭도 투옥되었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권력기반이 없던 화궈펑도 곧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마오의 뒤를 이은 사람은 덩샤오핑이었다. 예젠잉 등 원로 그룹이 모두 그를 지지했다. 마오쩌둥의 의중에는 들어있지 않던 구도였다. 그 덩샤오핑은 문혁 시절 홍위병들의 공격대상이 되었으나 저우언라이의 보호로 목숨을 건졌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저우언라이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 또한 저우언라이의 공덕 중 하나로 칭송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저우언라이에 대해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있다.

우선, 류샤오치와 펑더화이에 대해서는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오의 의지가 워낙 확고했기 때문에 눈치를 본 것이 아니냐?

둘째, 4인방이 한창 위세를 떨칠 때 제2의 실력자로서 전혀 제동을 걸지 못했다는 점이다.

셋째, 덩샤오핑 등을 보호했다는데, 너무 소극적인 행동이 아니냐는 의문이다. 문혁, 즉 문화대혁명이 부당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치생명을 걸고 마오에게 간언, 혹은 항명 했어야 제대로 된 2인자의 처신이 아니겠는가? 마오의 눈치만 살피며 사실상 비서실장 정도의 역할에 그쳤다며 비판해도 할 말이 없으리라.

한 발 더 나아가서, 만약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 사후까지 살아있었다면, 4인방의 제거가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도 있다. 평생을 온건파였던 저우언라이가 오히려 방해물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면 지나치게 가혹한가?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가 결국 죽음을 맞은 평더화이는 생전에

내시 같은 놈,

이라며 저우언라이를 싫어했다고 한다. 류샤오치도 마찬가지.

혁명시절 한 일이 뭐가 있느냐?,

 

후계자의 처신도 힘이 들지만 제2인자의 역할도 쉽지는 않다. 저우언라이가 과연 훌륭한 2인자였는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권력자의 자세가 아닐까? 결국 마오가 저우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만주의 군벌 장쩌린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암시가 될 수도 있겠다.

장쩌린은 한 번 부하로 삼으면 끝까지 신임했다고 한다.

한 때 신임했던 자를 내쫓으면 남들이 나를 비웃는다.”

그래서, 중요한 군자금을 도박으로 날려버린 부하를 벌하기는커녕, 다시 돈을 주며 잃어버린 돈을 따오게 했다는 장쩌린이다.

그런 그도 8년간 보필했던 비서실장을 파면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그동안 내 말에 한 번도 반대해본 일이 없다. 시키는대로만 했으니 쓸모 없는 놈이다.”

이 대목에서는, 일개 군벌 장쩌린이 대륙의 지배자 마오쩌둥보다 한 수 위로 보이지 않는가?

 

    고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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