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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놀자⑨>십족을 멸하라?

 

 

조선 시대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 형을 받았는데, 태() ·장() ·도() ·유() ·사() 이렇게 5형이 기본이다.(사진출처: 구글>

                                       

 

조선시대의 정치사는 유배(流配)와 사약(賜藥)의 기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법들을 옥에 가둬두지 않았다. 멀고도 험한 곳, 이른바 원악지(遠惡地)로 귀양을 보냈다. 정면, 즉 쿠데타 주모자가 아니면 처형하지 않았다. 사약을 내려서 마시고 죽게 했다. 선비의 나라, 문치(文治)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약사발을 들어 마시는 조선 선비의 모습과 칼로 배를 가르는 일본 무사의 모습을 나란히 떠올려보라. 그렇게 달랐다.

 

   우선 유배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시대 형벌규정은 중국의 대명률을 바탕으로 했다. 유배는 3단계였다.

   장()/백에 유() 2천리.(곤장 /백대를 치고 2천리 밖에 유배한다)

   장 /백에 유 25백리

   장 /백에 유 3천리

   좁은 한반도가 아닌가. 2천리, 3천리씩 멀리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실링에 맞게 조정되었고 장 /백대도 생략했던 것으로 보인다. 곤장 /백대면 생명이 위태롭다. 함경도의 산속, 전라도 바닷가, 그리고 제주도가 험한 유배지로 꼽혔다.

 

 

제주 대정 추사적거지에서 김정희 선생 유배행렬 재현 모습과 고단한 유배생활이 엿보인다.<출처: 신문고뉴스>

 

 

 

   의금부도사가 죄인을 압송해가서 유배지의 고을수령에게 인계한다. 수령은 또 그 지역의 유력인사에게 맡기는데, 이 사람을 보수주인이라고 했다. 보수주인은 죄인을 위해 집 한 채를 내줘야 하고, 관리감시의 책임을 진다.

   제공되는 것은 집 뿐이고, 먹고 입는 것은 본인 부담이다. 대개는 가족 중 누군가가 따라가거나 하인이 뒷바라지를 했다. 물론 부인이 함께할 수는 없었고, 다른 가족이나 친구들의 방문은 자유로웠다. 보수주인이 일일이 확인하고 감시했겠지만.

   서울에 있는 본가에서 쌀이며 부식, 옷가지 등을 보내주니 생활의 어려움은 없었다. , 제주도의 경우는 뱃길이 험하고 먼 데다 지역의 형편이 워낙 어려워서 유배객들도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세 가지 어려움을 하소연한 사람도 있다.

   밤에 파도소리가 슬프고

   조밥을 넘기기가 힘들고

   뱀이 많아 두렵다....

 

   유배지에서의 일거일동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정해진 고을의 행정구역 밖으로만 나가지 않으면 나들이도 하고 경치 구경도 다닐 수 있었다. 마음만 편히 먹는다면 요즘의 도시인들이 꿈꾸는 전원생활이 아닌가. 하지만 정치범들이다. 조정의 실력자였던 사람들이다총구석, 섬마을에 묻혀있는 나날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그래도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시절에 자신의 예술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고, 다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서 엄청난 저작을 쏟아냈다. 유배기간을 인생의 황금기로 만든 사람들이다.

   유배는 기본적으로 무기한이었으나, 대개는 중도에 사면이 되곤 했다. 왕의 노여움이 풀려서, 조정의 세력 판도가 달라져서, 갑자기 그 사람이 필요해져서, 왕이 죽고 새 왕이 즉위하니 그 특사로...하지만 유배지에서 끝내 사약을 받게 되는 사람도 있다. 귀양 가는 도중에 당하기도 하고, 애초부터 사약 처분으로 결정될 수도 있다.

 

 

 


한말의 화가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가운데 하나이다. 왼쪽의 무릎을 꿇고 앉은 자가 사약을 마시는 찰나이며,

 주변의 관리와 아전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약.

   조선의 국법에는 나와 있지 않은 형벌이다. 형전(形典)에는 교수형과 참수형만이 명기되어있다. 하지만 정치범으로 처형된 사람의 90% 이상이 사약을 받아 마셨다. , 법에도 없는 제도가 통용되었을까?

   사약은 임금의 아량이요 배려로 여겨졌다. 정치범들의 대부분이 왕족 아니면 사대부였으니, 그들의 명예를 생각해서 내리는 처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들 주상전하의 은혜운운하며 달게(?) 약을 마셨던 것이다.

   이렇게 법외의 제도였기에 그 시행에 관한 세부사항도 기록이 없다. 다만 야사에 나와 있는 여러 사례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사약의 성분은 비상 등 극약은 아니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인삼, 부자 등 몸의 화기를 돋우는 약재들이 가루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약주머니를 의금부도사가 가지고 간다.

   자기 집에서건, 유배지에서건, 도중의 주막집에서건 금부도사가 들이닥치면 우선 방에다 뜨겁게 불을 땐다.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죄인이 꿇어앉는다. 복장은 흰색이라야 하지만 상황에 따라 깨끗하고 검소한 옷이면 된다. 머리는 풀지 않았던 듯하다.

   준비가 되면 금부도사가 교지를 펼쳐 있고, 죄인 앞에 놓인 상에 약사발을 내려놓는다. 약가루를 물에 탄 것이다. 죄인은 북향사배, 즉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왕의 은혜에 감사하고 죄를 뉘우치는 내용이다. 연산군 시절에는 껄껄 웃으며 불복하는 마음을 표한 사람도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술에다 약을 타서 마신 에피소드도 전해져온다.

   그렇게 약을 마시고, 불을 땐 방에 들어가 누워있으면 몸속에 화기가 끓어 올라 내출혈을 일으켜서, 피를 토하며 죽게 된다고 한다. 꽤 오래 걸렸고, 약효가 나지 않아서 두 번 세 번 마시는 경우도 있었다.

 

   세로 때의 사육신처럼 직접 쿠데타를 도모했던 죄인들은 유배나 사약의 특혜(?)를 받지 못하고 교수형이나 참수형을 당했다. 사지를 찢어죽이는 참혹한 형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가혹한 조치는 바로 연좌제였다.

   역모에 연루된 경우 흔히 3을 멸하곤 했다. 여기서 3족은 친가·외가·처가가 아니라 3를 말한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 본인과 형제, 아들과 그 사촌들까지 남자라면 모두 죽이는 것이다. 우리 조선에서는 3을 멸하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중국에서는 9을 멸하기도 했다.

   본가로 4.

   외가로 3.

   처가로 2.

   이렇게 9이다.

   어디 그 뿐인가. 명나라의 영락제가 방효유라는 사람을 처형할 때는 10을 멸했다. 마지막 1족은 그 친구와 제자, 선후배 등 교우관계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처형과 연좌제의 극한이었던 셈이다. 도대체 몇 명이나 죽었을까? 우리 조선은 그래도 양반이었네하고 말해도 될까? 

 

 고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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