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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24의 힘!-⑤> 가치의 폐허 속에서 이끌어낸 위대한 긍정

 

- 몽테뉴 수상록에서의 인간탐구

 


미셸 에켐 드 몽테뉴(1533~1592) 초상, 수상록1588년 프랑스어판 표지와 한글판<사진인용: 중앙일보>

 

 

고전은 전범·전형(典範·典型)을 담고 있기에 가치가 큽니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가 있습니다. 고전은 바로 이러한 점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독서는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기호인 양 인식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고와 상상의 원천이 독서일진대 독서를 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방도는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독서가 싫은 사람일수록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 고전 한 권이 일반서(대중서·개념서) 100권 또는 1000권을 갈음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24의 힘!시리즈는 인문·사회·자연·응용 과학 부문의 고전 24권을 선정하여 앞으로 3년에 걸쳐 유명 인사들의 독서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개글을 받아 연재할 계획입니다. 구성은 필자(또는 화자) 소개, 집필 배경, 주요 구성 내용, 당대 및 현재의 의미와 가치, 읽어야만 하는 이유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학우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일독을 바랍니다. <편집국씀> 

 

    이규식(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수필이 싹트다

한 권의 저서 수상록으로 500년 가까이 세계문학사를 대문자로 장식해온 미셸 드 몽테뉴(1533-1592). 근대 수필문학의 창시자, ‘에세이라는 문학장르 이름이 유래한 原題 '레 제세(Les Essais)'-‘수상록에서 몽테뉴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이 작품의 개요를 요약하거나 초록으로 적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한정된 주제 없이 독립된 성찰로 구상되어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그의 문학사상 이해에 지장이 없는 독특한 양식을 개척한다. 몽테뉴는 에세 (여기서는 써본다, 붓 가는대로 생각을 따라 적는다 (글자 그대로 수필의 뜻)’라는 제목처럼 자유롭고 편안하게 자신을 그리려는 시도에 몰두하였다. 그 성공여부를 떠나 16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일련의 근대적 글쓰기 방법과 결실은 놀라움을 준다. “바로 나 자신이 내 책의 소재이다라고 말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통하여 자기 자신 이상의 것 즉 보편적인 인간을 발견하도록 한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다. 16세기 글임에도 바로 오늘 이웃과 자신의 속내 이야기를 듣는 듯 생생하게 뇌리에 닿아온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속에 인간조건의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라는 진술처럼 영원한 보편적 인간의 형상으로서 그는 오늘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몽테뉴라는 한 개인을 통하여, 더 구체적으로는 한 시대의 꿈과 아픔을 나누면서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지표를 모색해 나가는 한 인간을 통하여 형상화된 보편성에 다름 아니다.

      

    ‘나 자신에서 인간그리기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와 독서와 사색에 몰두한 이후 몽테뉴는 자신을 그린다는 일관된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였다. 자신을 그리는 작업은 우선 스스로를 알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조심스러운 탐색의 과정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그리려할 때 무엇보다 먼저 묘사의 대상이 되는 는 누구인가 하는 본질적 물음 앞에 서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영원한 스승 소크라테스의 명제 너 자신을 알라를 가장 정직하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프랑스 사상가 겸 작가로 꼽힌다. 이 자아탐색 과정에서 시종 명료성을 유지한 것은 얼핏 보면 당연한 듯 하지만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아에 대한 감상적 연민이나 낭만적 도취의 유혹, 자기 합리화를 최대한 멀리하면서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명석함으로 진실에 다가서려 하였다. 이 진실은 사전에 확정되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기나긴 모색과 주저, 시도 끝에 얻어진 험난한 결실 그 자체였다.

 

  몽테뉴 성관.

 

 

   왜 글을 쓰는가 

   몽테뉴에게 있어서의 글쓰기행위가 갖는 중요성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글쓰기를 통하여 자유분방한 정신과 사색에 고삐를 달고 길을 인도하는 임무를 시도하였다. 독서를 즐기고 명상에 잠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글쓰기를 병행함으로써 방황하는 몽상, 모호한 의식을 명확한 사고와 구체적인 형태로 고정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면세계를 더욱 분명하게 파악하고 싶어 했다. 언어가 사상에 봉사하고 문체는 사상의 자연스러움과 역동성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에 앞서 말의 의미에 무게와 깊이를 부여하는의식적인 문인이었다. 뜻하지 않은 이미지, 어휘의 예상치 못했던 결합으로 엮어지는 글을 통하여 자신의 새로운 사고의 지평이 열리고 숨겨진 비밀과 만나는 놀라움과 기쁨을 체험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오늘의 수필문학이 지향할 하나의 미덕을 발견한다. 다른 문학 장르와의 변별성과 경쟁력이 거기 있다.

 

    아울러 자신을 그리는 작업이 개인차원을 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형상화하기에 이르렀던 사실도 주목할만 하다. 자신의 작업이 필연적으로 인간 전반으로 확대될 것임을 의식하면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개개인은 자신 안에 인간조건의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 아래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답하려 시도하였다. 다만 그는 이 작업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했는데 그것은 자신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또는 잘 알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낭만주의자들처럼 자신을 예외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주변과 다름없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이웃의 누군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듯 최대한의 객관성을 자신에게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몽테뉴 자신의 초상화가 보편적 인간의 그림으로 구체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극기(克己)’에서 회의(懷疑)’ 

    ‘에세에서 일관된 구도나 철학적 체계를 찾기 어려운 것은 자유와 독립을 소중하게 여기고 모든 독단론을 비웃었던 그의 지적태도를 감안할 때 당연하다. 그러나 에세에서 그가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몇 가지 철학 명제를 찾아본다. 그는 처음 극기주의에 경도되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기질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피할 수 없는 고통, 불안,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이를 이겨내고 정신적 평정을 유지할 방법을 모색했으며 그것을 극기주의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먼저 고통의 문제가 다가선다. 삶에 있어 고통은 수없이 널려있다. 그리고 수시로 우리를 엄습한다. 모든 종류의 고통에 우리는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한 조건과도 같다. 그러므로 고통에 대비하는 방식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몽테뉴는 극기주의에서 어떤 해결책을 발견하였을까. 고통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그것을 느끼고 괴로움을 겪는 육체에 대하여 우리는 통제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연의 범주 즉 감각의 범주에 속한 것이므로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자연이 우리에게 통제력을 허락하지 않는 감각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이 감당할 수 있는 정신에 있다.

 

    고통을 느끼면 괴로워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는 극기주의에 경도된 시기에도 인간에 대한 현실주의 인식을 떠나지 않았다. 극기주의는 최소한의 것이며 그 바탕은 대단히 인간적이었다. 그는 고통을 이기고 넘어선다기 보다 고통을 덜 느끼는 방식, 보다 잘 견디는 입장에서 극기주의를 수용하였다. 고통의 공포를 감각차원에 한정시킴으로써 정신의 자유와 평정만은 유지하려 하였다. 그에게 극기주의는 고통과 정면 승부하여 승리하려는 공격적 무기가 아니다.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라도 지키기 위한 방어목적의 수단이었을 따름이다.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죽음은 인간이 당면하는 필연적인 종말인 점에서 삶의 한 조건과 같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가 비열하게 회피하거나 의연하게 대처하거나간에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는 만큼 흔들리지 않고 맞이하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상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음 그 자체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갖는 낯설음 때문이 아니겠는가. 죽음을 외면하거나 잊으려 하기보다 죽음을 똑바로 보고 가까이 함으로써 죽음과 친해지도록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일상의 삶 속에 끌어들여 더불어 살도록 몽테뉴는 권면한다.

 

    몽테뉴는 어떻게 해서 극기주의에서 회의주의로 넘어갔을까. 인간이 고통을 느낄 때 아픔을 표현하고, 두려움이 나타날 때 그것을 피하려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한 그는 가장되고 허황된 영웅주의를 믿지 않았으며 최소한의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것에 만족하였다. 그의 회의주의 가운데 현실감각은 깊이와 폭에 있어서 차원을 달리한다. 극기주의 최후의 보루였던 정신의 자율성마저도 회의의 물결에 휩싸인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극기주의적 태도는 매력 있는 해결책이기는 하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감각적 동요에 초연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의지와 자율적 이성을 소유하고 있겠는가. 인간의 무력과 허무함에 더욱 민감해진 그는 인간의 모든 확신과 오만을 비웃는 또 하나의 철학세계에 이끌려 들어갔다.

 

    도대체 인간이 확실히 안다고 확실히 단언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상호 모순되는 주장으로 엇갈리는 독단론 철학에 대하여 그가 최후로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Que sais-je)?’ 라는 물음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이 경우 나는 모른다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확실한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이 보편적 부정은 몽테뉴 정신모험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만약 회의주의와 논리를 따라 극단까지 밀고 나간다면 우리는 완전한 침묵과 무행동에 귀착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몽테뉴는 그러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 부정을 통하여 하나의 현명한 삶의 방식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여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적탐구의 결론으로서의 회의주의가 아니라 거기서 도출할 수 있는 실제 모랄의 배경으로서의 회의주의이다. 그것은 세계를 향하여 열려있는 사고이며 그 다양성과 복합성을 수용할 수 있는 관대한 정신이다. 회의는 정신을 마비시키는 무관심으로 이끄는 대신 정신으로 하여금 항상 깨어있게 하며 이로써 인간과 세계의 폭을 넓혀가게 된다.

 

 

몽테뉴 당시의 그의 본거지 보르도 시내 지도.

 

 

   겸손과 節度를 찾아서 

    인간과 현실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의 몽테뉴의 현실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가 극기주의에 기울었던 초기에 이미 사고의 바탕으로 나타났으며 회의주의에 이르러 보다 의식적이고 포괄적인 형태로 형성되었다. 몽테뉴의 모든 윤리명제의 기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긍지를 고양했던 극기주의를 끝까지 따르지 않은 것도 이 현실주의적 감각 때문이었으며 그가 인간최대의 미덕으로 믿었던 겸손의 근원도 이것이다.

 

    절도를 지킨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영역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역이 한정되고 상대적이므로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 우리 감각은 시시때때로 변하고 이성은 어떠한 확신에도 도달 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존재와 세계에 대하여 인식하는 것은 모호한 외양과 그림자뿐이며 불확실하며 허약한 의견일 따름이다. 절대와 확신에 대한 희구는 헛된 일이며 환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합리적 근거가 결여된 것들을 파괴하고 뒤엎어 버릴 것인가. 몽테뉴는 여기서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또 하나의 상대적 질서를 위하여 여러 파괴와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곳의 규칙과 법을 준수하는 것은 규칙 중의 규칙이요 법 가운데 법이다라고 몽테뉴는 이야기했다.

 

  몽테뉴 초상.

 

   어떻게 살 것인가”- 본성(本性)으로 돌아가기 

    몽테뉴의 관심은 이 하나의 명제에 집중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현명한가. 인간이 인간으로 머물 줄 아는 겸손과 절도, 관념의 오만과 광신의 열광에서 해방된 정신의 자유, 더러는 무관심과 유보도 필요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표현이 있다. 자연, 가시적인 자연대상물로서의 의미라기보다는 본성, 천성의 뜻이 더 어울린다. 이야말로 인간이 따라야할 다정한 향도(嚮導), 신중하고 공정한 향도이다. 인간의 불행과 비극의 근원은 본성을 거역하는데서 비롯된다. 이 비극에 대한 치유책은 인간의 척도를 지키는 것, 본성으로 돌아가는데 있다. 그때 인간은 참된 만족과 평화를 얻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몽테뉴의 신뢰는 거의 신앙에 가깝다.

 

    그의 에세장르는 영국으로 넘어가 그 후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몽테뉴는 오늘날 널리 보급된 장르의 하나인 에세이, 수필, 수상이라는 문학영역의 씨를 뿌리는 동시에 소중하고 영원한 주제의 하나인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유연한 해석을 앞서 제시하였던 것이다.

 

    몽테뉴 문학사상이 거쳐 온 세 단계는 별개의 경험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고 상호 침투되어있다. 그가 도달한 최후의 예지 속에서 극기주의는 배제되지 않고 그의 본래 기질 속에 융해되어 삶과 현실에 대한 초연하고 자유로운 사고를 뒷받침하고 있다. 인간의 오만과 망상이 만들어낸 헛된 관념들을 비웃는 회의주의는 그의 인간학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하는 의식의 명석함이며 삶의 방식을 정립시키는 존재론의 기반이 된다. 요컨대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결론이 아니라 진정한 내적탐험의 발판이 된다. 부정과 파괴에 그치지 않고 16세기 후반 프랑스, 신산한 사회 환경 속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가치의 폐허 속에서 위대한 긍정을 이끌어냈다. 몽테뉴는 그의 시대 가운데 산재하는 모든 주제를 흡수하여 놀라운 종합을 이루어냈다. 결국 이후 에세이, 수필의 지향점도 몽테뉴가 제시한 여러 담론과 명제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전개되면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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